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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기선씨에게 원주의 미정이가’ 그리고 그 내용은 그 동안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여 오던 원주의 부모들이 오늘에야 결혼을 승낙하여 주셨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 기억이 희미해져 갈 무렵, BOQ로 한 통의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
당번인 김 일병이 전화를 받았다. “누구십니까? 정기선 중위님 말입니까?” 나는
그 순간, 그 전화가 원주의 미정씨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김 일병, 아무 말
말고 그 전화 나를 바꿔 줘.” 나는 전화를 받아 들었다. 미정씨는 저, 저, 하면서
BOQ로 전화를 해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기선씨가 오랜 기간 연락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전화를 했노 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군인이 죽으면 보통은
직계가족에게나 연락을 하지, 애인에게까지 연락해 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아마도 정기선 중위의 집에서도 미정씨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터였다. 나는 차마
무어라 말을 못하고, 이따가 다시 이쪽에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미정씨는 자신의 전화번호는 기선씨가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사정이 있어 그러니 이리로 연락하지 마시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전화번호를 받아 든 나는 차마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그 비참한 소식을 전하여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정기선 중위가 사용하던 유품들을 찾아내고
정리를 마쳤다. 마침 일주일 뒤면 내게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
이야기도 해 주고, 유품도 전하려고 생각을 했다. 나는 휴가를 나가면서 미정씨에게
전화를 하여 원주 어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고향집이 있는 풍기를 가기
위해서는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원주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원주에서 내려, 미정씨를 만나 전하여 주고 갈 계획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원주에 내린 나는 약속 장소로 찾아갔다. 굳이 미정씨를 찾지 않아도 한 눈에 나는
그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얀 피부에 조그맣고 귀여운 아가씨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나는 그녀와 마주앉아 우선 물 한 컵을 들이켰다. 그러나 차마 눈까지
마주칠 순 없었다.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한참이나 뜸을 들인 끝에, 나는 결심을
하고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을 소상하게 그녀에게 전하여 주었다. 그리고 정성스레
싸온 유품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미정씨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는 미정씨에게 인사를 하고 그 장소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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