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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외간 여자와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도 잠이 오지 않을뿐더러, 어떤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아야 할지도 잘 몰랐다.
결국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은 나는 윗목에서
쪼그려 자고, 재은이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윗목에서
쪼그리고 자는 나에게 재은이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으나, 우리는 아무 일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 헤어졌다. 그 일이 아마도 재은이에게는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 재은이는 나를 부쩍 더 따랐다. 마지막
휴가 때 나는 재은이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재은이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꺼이 방 하나를 내어 주었고, 아침에 일어난 재은이가 “오빠는 일찍
잠들었나 봐. 방문을 두드려도 모르고 자더라.”라고 말했다.
그 이후 나는 제대를 했고 재은이를 만나 솔직하게 말했다. “너를 사귈 마음의
준 비 가 되 지 않 았 을 뿐 더 러 , 내 가 사 귀 던 누 군 가 의 생 각 이 뇌 리 를 떠 나 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고, 그 후 십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재봉이와 함께 재은이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회사에 다니는 신랑을
만나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은이 와의 인연은 그것이 다였다.
마지막 휴가 때 재은이를 만난 날, 나는 그야말로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그
날 나 는 술 에 취 한 채, 청 량 리 588이 란 홍 등 가 를 찾 아 들 었 고 , 그 곳 에 서
어이없게도 나의 총각 딱지를 떼고 말았다. 참으로 내게는 슬픈 순간이었을 것이다.
껌을 짝짝 씹어대던 588의 여자. “빨리 안 하고 뭐해?” 그 동안 내가 꿈꾸어왔던
성(性)에 대한 가치관과, 모든 기대와, 성에 대한 아름다움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나는 느껴야 했다. 아침이 되어 그곳을 나서자, 나는 갈 곳조차 모르고 서울
거리를 헤매었다. 마지막 휴가 뒤 나는 부대로 돌아갔고, 제대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신병으로 입대한 친구의 애인이 면회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 때 부대는 비상이
걸려있어 외출이나 외박은 금지 상태였으나, 나는 신병을 남몰래 외출하게 해
주었다. 나는 당시 BOQ를 담당하던 최고 고참이었기 때문에, 하룻밤 신병을
외 출 시 켜 줄 만 한 정 도 의 ‘ 끗 발 ’이 있 었 던 것 이 다 . 나 는 대 신 신 병 에 게
여관방에서 절대 나오지 말고 꼭꼭 숨어 있으라고 당부했는데, 불행하게도 그
친구는 헌병의 불심검문에 걸려들어 부대로 잡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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