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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기로 가는 열차 속에서 나는 미정씨의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자꾸만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의 그 아이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그 아이를 만나려고 밖으로 나섰다. 막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등 뒤에서 던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집 딸, 결혼한단다.” 어머니는 무심코 내게 던진 말씀이었으나, 그 순간 나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내 눈 앞은 갑자기 캄캄해졌다. 어쩔 것인가? 나는 집을 나선 김에 그 아이의 동생 명희를 만났다.
명희의 입을 통하여 어머니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주에 살고 있는 중앙대학교를 나온 남자와 결
혼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뚝방 길과 다리 밑,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고, 그저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내가 그 숱한 어려움 가운데 에
서도 잘 견디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나는 결국 그 아이의 집 앞
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꼬박 밤을 새고 말았다. 새벽녘에 화장실을 가는 그 아이의 그림자를 숨어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파 속으로 울었던 그 날의 그 가슴 아픈 기억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날 나는 결국 그 아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 부대로 돌아와 버렸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너무나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어떤 동료는 내게 묻기를 “고무신 거꾸로 신었더냐?”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질문은
나의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사랑을 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었고, 더군다나 사랑을 나
누었던 사이도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는 얼마간 또 시간이 흘러갔다. 제대를 어느 정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재붕이의 동생 재은이가 면회를 왔다.
재붕이를 면회하러 왔는데, 며칠간 외부로 훈련을 나가고 없어 나라도 만나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에 면회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내가 재은이를 알게 된 것은 같은 부대에 있던 재붕이와 휴가를 나갔을 때 재붕이네 집에 함께 갔다가
우연히 재은이를 알게 되었고, 재붕이의 아버님과 어머님도 내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재은이를 보게 되었고, 오빠 대신 나라도 만나고 가겠다는 재은이와 면회실에서 만나 외박을 허락 받고
나가게 된 것이었다.
그 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외간 여자와 함께 한 방에서 잠을 자게 되었다. 밤이 깊어가도 잠이 오지 않을뿐더러, 어떤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아야 할지도 잘 몰랐다. 결국 이런 얘기 저런 얘기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은
나는 윗목에서 쪼그려 자고, 재은이는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깜빡 잠이 들었을 때 윗목에서 쪼그리고 자는 나에게
재은이는 이불을 끌어다 덮어주었으나, 우리는 아무 일도 없이 아침에 일어나 헤어졌다. 그 일이 아마도
재은이에게는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 재은이는 나를 부쩍 더 따랐다. 마지막
휴가 때 나는 재은이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재은이 부모님이 나를 위해 기꺼이 방 하나를 내어 주었고,
아침에 일어난 재은이가 “오빠는 일찍 잠들었나 봐. 방문을 두드려도 모르고 자더라.”라고 말했다.
그 이후 나는 제대를 했고 재은이를 만나 솔직하게 말했다. “너를 사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내가
사귀던 누군가의 생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었고, 그 후 십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재봉이와 함께 재은이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회사에 다니는 신랑을 만나 잘 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재은이 와의 인연은 그것이 다였다. 마지막 휴가 때 재은이를 만난 날, 나는 그야말로 코가
비뚤어지게 술을 마셨다. 그 날 나는 술에 취한 채, 청량리 588이란 홍등가를 찾아 들었고, 그 곳에서 어이없게도
나의 총각 딱지를 떼고 말았다. 참으로 내게는 슬픈 순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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