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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관대한 호주인
내가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NSW) 대학에 박사학위를 취득하러 갔을 때다.
박사학위를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영어를 해야 하고, 영어를 하기 위해서는
랭귀지 스쿨을 다녀야 했다. 그런데 다니다 보니 자꾸 하느님의 일로 뜨겁게 해
주셔서, 학업을 중간에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학교에서 남은 기간을 아내에게 대신 배우게 해야겠는데 비자가 문제였다. 나는
스튜던트 비자(학생 비자)로 갔고, 아이들과 애들 엄마는 동반 비자로 갔다. 그런데
언어를 배우려면, 그리고 호주에 남아 있으려면, 동반 비자를 한국이나 외국에 가서
바꿔서 다시 호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학교 측에서 운영하는
랭귀지 과정도 리펀드(환불) 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한국 유학원에서
어느 정도 수수료를 가져갔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일단 체스우드(Chesewood)
이미그래이션 (Imigration Department)에 가서 비자를 바꿔야 하는데, 호주
에서는 학생 비자로 왔던 사람과 학생을 동반해서 온 사람을 현지에서 그 자격을
바꿔주는 법률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현지의 김태현 서울 교회 목사님께
물어봤다. 그 역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변호사(한국)를 만나서
상의했더니, 그도 역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낙담해서 집으로
돌아왔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왠지 잘 될
것이라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나는 체스우드 이미그래이션(우리로 이야기하면
아마도 ‘출입국 관리소’쯤 될 것 같다.)을 갔다. 그리고 짧은 영어로 말하는
것보다는 우리말로 “이곳의 총 대표 오라고 그래, 총 대표 오라고 그래!”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호주 캠씨에는 한국인이 많이 살지만,
체스우드, 그것도 그날따라 이미그래이션 에는 한국인이 없었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모른다. 그랬더니 총 지배인이 왔다. 그리고 대체 왜 그러냐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짧은 영어로 “당신, 나하고 잠시 시간을 좀 내달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한 달
걸린다는 것이었다. 즉 예약하고 만나자는 것이었다. 나는 비자 연장이 안되면
(바꿔서) 다음 주에 나가야 되는데, 어떻게 한 달 뒤에 오냐고 여권을 제시했더니,
그걸 보고는 내일 아침 9시에 다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집에 와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짐을 싸고 있는 애들 엄마에게, 잠시 짐 싸는 것을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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