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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에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는 문을 꽝 하고 닫아 잠그고 “종아리 걷어 올려!”
라고 하시고는 이내 내 귓속에다 대고 “소리만 질러.” 하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
는 금방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아차렸고, 마치 배우가 연기를 하듯 아주 실감나게 소
리를 냈다. 큰아버지와 식구들은 모두 밖에서 기다리고, 할아버지는 대나무 목침에
수건을 말아서 회초리로 내려치셨고, 나는 그럴 때마다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지
금 생각을 해 봐도, 그 때 나의 연기는 아무래도 아카데미 아역배우상을 탈 정도의
명 연기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빙긋이 웃곤 한다. 그렇게 얼마쯤 지나니까, 큰아버
지는 마음이 약해 지셨는지 “아버님, 이제 그만 하시지요.”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이런 놈은 아주 본 때를 보여줘서,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
서 할아버지의 가짜 매질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 사건이 있던 다음 날부터 큰아버지는 한동안 나에 대해 미안해하시는 것 같았고,
친척들만 모이면 내가 놋그릇을 훔쳐다 엿 바꿔먹은 이야기를 즐겨 하시며 껄껄 웃
으시곤 했다. 우리 친척들 사이에서는 놋그릇 사건이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
고,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곤 했다. 그 날 모든 게 끝나고 할아버지와 나는 조용히 이
불 속에서 속삭였다. “왜 그랬냐?” 할아버지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다정스럽게 말
씀하셨다.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너무나도 엿이 먹고 싶었고, 한 가락을 먹으나
열 가락을 먹으나 어차피 혼이 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많이 먹고
혼나자 해서 그랬어요.”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내가 그래서 너
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암, 장차 사내 대장부가 되려면, 너 만한 배포는 돼야
지!” 라고 흡족해 하시면서 나를 품에 안고는 이내 잠드셨다. 나는 그 날 할아버지
께서 흡족하게 웃으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단양팔경 중 충주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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