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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대학원 기말고사가 내일인데도 일이 많아서 공부를 못했다. 그날 밤,
밤을 새워서 벼락치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애들 엄마에게 먹을 것을 준비
해 놓으라고 하고, 막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나는 전화를 받았고,
수호 엄마는 울먹이면서 서울이 타향이라 친척도 없고, 그래서 전화를 드렸노라 하
면서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집 안에 시어머니와 자신밖에 없어서, 밤이고 해서
어떻게 할 수 없는데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좀 망설이다 대답을 했다. 수호 엄마 하면 알레르기를 일으키다 보니 잠시 머뭇
거렸다. 그러나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리고 아는 사람이 도와달라는데 어떻게 안 가
겠는가 싶어서 주소를 물으니까, 중계동 한신코아백화점 뒤에 있는 청구아파트 8층
몇 호였다. 나는 그리로 가면서 원자력병원에 근무하던 이미재 씨와 이영수 씨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도 진단방사선과에 근무하고 있다.) 미안하지만 구급차 1대를 어
디로 보내달라고 했더니, 사고로 죽은 사람이 아니면 죽은 사람을 영안실로 안 들인
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경질을 한 번 냈다. “무조건 찾아와! 몇 동 몇 호야!” 하고
그냥 전화를 끊고 들어가 봤다. 들어가보니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요 위에 누워 계셨
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나는 우선 두 사람을 안심시
켜 놓고, 염을 하기 시작했다. 염은 아버님이 언젠가 누구에게 가르쳐주는 소리를 들
은 대로 똑같이 해 봤다. 콧구멍, 입, 항문은 솜으로 틀어막고, 두 팔과 두 다리는 몸
에 이불 호청을 뜯어서 묶고, 몸은 하얀 이블 호청으로 둘둘 말아 싸고, 끝으로 끈으
로 묶었다. 그런데 시체를 집 밖으로 내가야 하겠는데, 버팀목과 끈을 같이 묶어서 부
목을 했더니 중계동 엘리베이터가 작아서 들어가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톱으로 자를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시체를 들쳐 업었다. 그리고 8층에서 1층까지 시체를 업고
내려왔다. 막 내려오니까 구급차가 도착했고, 나는 구급차와 함께 원자력병원 영안실
까지 함께 갔다. 그리고 모든 절차와 수속을 다 밟아준 다음 얼마 안 있으니까, 그들
친척들이 왔고 곡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쯤에서 슬그머니 밖으로 나왔고, 누구도
내가 누군지, 무엇 때문에 거기 있다 가는지 아무도 몰랐다. 수호 엄마는 그저 우느라
고 정신이 없고. 그래서 혼자서 슬슬 내려오는데,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이 ‘잘
했어요.’ 하면서 칭찬해 주는 것 같았다.
43) 서언 기도
그 때 마음 속 어디에선가 뜨거운 무엇인가가 올라왔다. 아무 인연이 없는 분이지만
마지막 가는 길은 지켜 주었다는 생각과 함께, 나도 모르게 찬송을 부르고 있었고 하
느님은 하늘나라에 소망을 그 날 심어주셨다. 나는 그 날 하느님께 서언기도를 했다.
‘나의 삶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였다. 나도 모르게 한 나의 서언기도
였다. 주님께서 미워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니까 축복해주시는 것이었다. 그날의 서
언기도는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 날 이전까지 나는 남을 위해서 살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실천은 못하고 살았다. 그런데 그 날 이후부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남을 위
해 사는 길에 나서게 되었다. 나 자신만을 위해 살 때는 누구도 내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도 않고, 누가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내 성격이 남에게 욕먹는 성격
도 아니고, 그 때까지 난 별 무리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그런데 그 서언기도를 하고
난 뒤부터는 모든 환경이 바뀌었다. 자꾸만 불쌍한 체육인이 눈에 들어오고, 자꾸만
남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족밖에 몰랐던 나에게는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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