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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풍기 동부교회를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다녔고, 음치면서도(음악의 도레미를
몰 라 서 ) 성가대에 들 어 가 붕어처럼 입 만 벙긋벙긋 벌 렸 다 . 성 가 를 부 르 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아마도 그 노래를 부르는데 동참하는 동안 무엇인가 모를
고향과도 같은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늘 교회는 열심히 나갔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더욱 더 교회를 찾았다. 아마도 내가 탈선 안 하고 축구나
연식정구를 하면서, 좌절하고 힘들 때마다 새로운 꿈과 목표를 재설정하고, 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와 생각하니 바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신앙적인
힘이었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유년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나를 가장 믿어 주셨고, 할아버지는 더욱 크게 나를
믿고 기대했으나, 오윤이 형님은 나를 허풍쟁이로 알고 계셨고, 나이가 들어서도
내가 하는 것은 늘 못마땅해 하셨다. 형님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성격이고, 한쪽을 줬으면 한쪽을 받아야 하는, 딱 정해져 있는 틀만이 존재한다고
믿고 계시는 분이었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가족들은 그저 가족으로서 생각했고
평범했다.
나는 새벽 기도도 많이 나가봤고 수많은 기도도 드렸지만, 하느님은 제대로 몰랐다.
그러던 중 수많은 사건을 접하면서 하느님을 깊이 알게 됐고,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하느님이 늘 나와 함께 계셨구나 하는 것을 그때야 비로소 깨닫게 됐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했는데, 내가 워낙 의심이 많고 안 보여 주면
안 믿으니까, 하느님께서는 수많은 사건을 통해서 당신이 살아계심을 믿게 해
주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셨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데, 보지 않고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리 식구는 이제 모두 기독교인이 됐고, 하느님께 감사하고 있다.
39) 어머니의 암 선고
얼마 전 일이다. 시골 형님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암이라는 것이었다. 그러
니 가족들이 모두 쉬, 쉬 하고 그냥 편안하게 돌아가시도록 비밀로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살아오셨는데… 너무나 기가 막혔다.
아버지도 결핵으로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마저 암이라니.
나는 기도했다. 그런데 암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가슴에 와 닿았다. 아마도 그것
을 알게 해 준 사람이 성령님이고, 하느님이고, 예수님이셨던 것 같다. 형님은 그냥
어머니 나이도 있고 하니, 그저 편안하게 돌아가시게 해야 한다고 하시며 가족들끼
리 여행을 다녀왔고, 어머니만 그 이유를 모르고 계셨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우리 집
에서만큼은 형님도, 누님도 내 생각을 가장 중요하게 들어주셨다. 그런 형님, 누님께
지금도 감사를 드린다. 나는 형님께 말씀을 드렸다. “돌아가실 땐 돌아가시더라도,
우리 형제들이 최선을 다 해보고 돌아가셔야지 우리도 후회가 없고, 어차피 가실 길
이라면 어머니도 알고 계셔야 떠나실 준비를 할 게 아니냐.” 나의 간곡한 부탁에 형
님과 가족들은 전부 다 내 뜻을 따라주었고, 어머니를 원자력병원에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지오비 회사 일로 대한 투자신탁 대강당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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