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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버지를 뵐 때마다 이런 결심을 했다. ‘나는 이 다음에 크면 내 가족을 철저
히 잘 챙기고, 특히 사랑하는 아내가 생기면, 아내가 행복해서 눈물이 다 날 정도로
잘해 줘야지. 나는 아버지처럼 어머니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지.’ 늘 그런 다짐
을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 또래 아이들이 남
몰래 다들 한 번쯤은 해 볼 법한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 커피숍이나 당구장 한 번 출
입한 적이 없는 모범생 중의 모범생 이였다.
그것은 오로지 내 인생의 목표가 가족, 특히 나중에 있을 내 아내에게 행복을 선사해
주기 위해서, 옳지 않은 일, 부끄러운 일을 안 하려고 무척이나 노력을 했다. 오직 건
강한 몸, 건전한 정신으로 아내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이미 그
때 다른 또래 아이들보다 생각이 꽤나 조숙(早熟)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당시 아버지는 글을 참 잘 쓰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네 사람들 한문도 모두 대필해
주셨고, 아버지가 한문으로 무엇을 적어주시면 나는 그것을 들고 십 리, 이십 리 길을
달려가서 전달해 주곤 했다. 나는 그런 심부름을 하면서도 한 번도 싫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 당시 아버지의 권위는 우리 집에서는 절대적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아버지에게 싫은 표정을 짓는다거나, 뜻을 거부하거나, 도전장을 낼 수
없는 그런 분위기였고, 아버지는 틈만 나면 우리에게 예법을 가르쳐 주시곤 했다.
우리 가족 3남 4녀 가운에서도, 아버지 역시 할아버지처럼 특별히 나를 아껴 주셨다.
할아버지에 이어서 아버지의 사랑도 나는 독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도 종종 어머니를 때리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은 집에 들어가 보면 어머
니의 눈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그럴 때면 나는 아버지가 무척이나 미웠다. 식
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도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시면,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손찌
검을 하셨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내가 있을 때는 절대로 어머니에게 손찌
검을 하시는 적이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면 ‘해결사’가 바로 나
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내 앞에서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으
셨나 보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참 싫었다. 능력도 없고, 걸핏하면 어머니를 손찌검 하고, 실속
없는 일만 하고, 자신보다도, 가족보다도, 친구와 이웃을 더 사랑하시는 그런 분이셨
다. 나는 그런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나 역시도 그런
점과 할아버지의 성품을 섞어서 닮은 것 같다. 할아버지는 호탕하고, 사업도 잘 하셨
고, 재력가셨고, 가족을 끔찍이도 아끼셨던 분이셨다. 그 반면에 아버지께서는 늘 병
으로 한 평생을 사시다 돌아가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 안타깝다. 요즘 폐병은
병 취급도 안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당시 폐병은 걸리면 거의 죽는 병으로 여기고
있는 때였다.(폐결핵 백신은 195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상용화가 시작되었음.) 아
버지는 수혈로 근근이 생명을 연장해 가셨고, 늘 수혈, 즉 핏값으로 병원 치료비로,
돈을 내다 보니 가족들의 살림살이는 오랜 병 구완으로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단양팔경 충주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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