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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큰아버지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유산을 잘 관리해서, 그 지방에서 제일가는 갑부이자 유지
(有志)로 지역에서 인정받으면서 사셨으나, 정작 나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면서
폐병마저 얻게 되어 47세라는 한창 나이에 일찍 돌아가셨다.
큰아버지는 칠성이 형님과 오상이 두 형제를 두셨다. 나를 무척이나 아껴 주시던 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아버지와 아버지 사이는 급속히 나빠지셨고, 아버지는 정든
고향을 떠나 돌아가시기까지, 한 번도 우리 집에 온 기억이 없다.
나는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계신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뒤돌아보면 참으
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두 분이 사이 좋게 사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혈육이라곤
두 형제 밖에 없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아버지는 자주 아버지에 대한 불만
을 주변에 말씀하시곤 했다. 나도 그런 큰아버지가 싫을 수 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고,
가족은 화목하게 지내 모든 일이 다 성공한다 했건만 두 분이 서로 위하면서 사셨더
라면 두 분 다 얼마나 서로 의지가 되고 도움이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무척이나
아쉬운 부분이다.
아버지는 훈장 선생님이 셨던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글을 참 잘 쓰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한문 글씨는 동네에서도 알아주는 명필이셨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큰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할
아버지에게서 재산도 많이 물려받아 그런지는 몰라도, 세상 물정에는 어두웠고, 평소
힘든 일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냥 저냥 사셨고 늘 아프셔서, 건강하신 모습
을 살아 생전에 뵌 적이 없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당시
에 나는 그런 아버지를 미워했다. 나는 할아버지는 참 좋아했는데, 큰아버지와 아버
지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무척이나 죄송스럽다. 이
미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큰아버지께도 뒤늦게나마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큰 아버지는 도담극장을 운영하고 농협 지점장도 하시면서 지방유지로 삶을 마치셨
는데 뒷방에서 하는 마작이 유일한 취미였다. 아버지와 큰아버지 관계가 좋지않았던
때문인지 어머니 조차도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큰아버지 도움은 받지 않으려
하셨다. 큰아버지는 잘 살고, 생활이 넉넉한 반면 우리 집은 아버지가 사업 하시다 어
려워지다 보니 돈 많은 큰집에서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기억에 특별히 남
는 아이스케키 사건과 큰아버지 놋그릇 사건이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도담삼봉 일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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