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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얼마쯤 지나니까, 큰아버지는 마음이 약해 지셨는지 “아버님, 이제 그만 하
시지요.” 하였지만, 할아버지는 “이런 놈은 아주 본 때를 보여줘서, 다시는 그런 짓
못하게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할아버지의 가짜 매질은 한동안 계속됐다.
그 사건이 있던 다음 날부터 큰아버지는 한동안 나에 대해 미안해하시는 것 같았고,
친척들만 모이면 내가 놋그릇을 훔쳐다 엿 바꿔먹은 이야기를 즐겨 하시며 껄껄 웃
으시곤 했다. 우리 친척들 사이에서는 놋그릇 사건이 언제나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였
고, 한바탕 웃음을 선사하곤 했다. 그 날 모든 게 끝나고 할아버지와 나는 조용히 이
불 속에서 속삭였다. “왜 그랬냐?” 할아버지는 언제나 마찬가지로 다정스럽게 말
씀하셨다. 할아버지의 물음에 나는 “너무나도 엿이 먹고 싶었고, 한 가락을 먹으나
열 가락을 먹으나 어차피 혼이 나는 것은 마찬가지니까, 그럴 바에야 아예 많이 먹고
혼나자 해서 그랬어요.”라고 하자,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시면서 “내가 그래서 너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암, 장차 사내 대장부가 되려면, 너 만한 배포는 돼야지!”
라고 흡족해 하시면서 나를 품에 안고는 이내 잠드셨다.
나는 그 날 할아버지께서 흡족하게 웃으시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할아버
지의 자상함과 남다른 이해력은 오늘을 사는 나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그날
밤 나는 창문에 비친 교교한 달빛이 너무나 따뜻하게 느껴졌고, 오랫동안 그날 밤 달
빛의 정겨운 느낌이 그대로 내 가슴 속에 지금도 남아있다. 할아버지의 수염을 만지
작거리는 나를 꼭 안아 주시는 할아버지의 품에서 나는 잠이 들었고, 오랜 시간이 지
난 지금도 꼭 친구 같고, 애인 같고,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의 사랑을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누구보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던 것 같다.
뒤늦었지만, 비로소 할아버지의 따스하고 지혜로운 사랑을 기억에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기쁨이다. 나도 이제는 내 소중한 사람에게 할아버지처럼 따스하고
지혜로운 사랑으로 관대하게 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돌이켜보면 너무나 후회가
되는 대목이다. 그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잊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따스함과 사랑을,
뒤늦게나마 깨닫게 된 것은, 어느새 나도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인생 전체에서, 아버지보다도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더 많다. 큰 집과 우리 집
을 통틀어서,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 중에서 오로지 나 하나에게만 관심을 보이셨다.
할아버지의 나에 대한 편애는, 내가 생각해도 지나칠 정도로 심하셨던 것 같다. 이렇
게 할아버지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는 나를 형이나 누나, 동생들 모두가 부러워하
는 것은 당연한 일 이다.
큰 집 형님들도, 우리 집의 형님들도, 누님도 나 이외에는 그 누구도 할아버지 근처에
도 얼씬도 못했을 정도로, 할아버지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유일하게 지지를 받
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종종 나를 무릎에 앉혀 놓으시고 당신께서 살아오신 이야기,
옛날 이야기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을 들려 주셨는데, 안타깝게도 지금은 대부분 잊
어버렸고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몇 가지 말씀만 기억에 남아 있다.
단양팔경 중 충주호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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