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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것이, 군인이 죽으면 보통은 직계가족에게나 연락을 하지, 애인에게까지
연락해 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고, 아마도 정기선 중위의 집에서도 미정씨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터였다. 나는 차마 무어라 말을 못하고, 이따가 다시 이쪽에서 연락을
드리겠다고 말하면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미정씨는 자신의
전화번호는 기선씨가 알고 있다고 했다. 나는 사정이 있어 그러니 이리로 연락하지
마시고,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말했다. 전화번호를 받아 든 나는 차마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그 비참한 소식을 전하여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정기선 중위가 사용하던 유품들을 찾아내고 정리를 마쳤다. 마침 일주일 뒤면 내게
휴가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 이야기도 해 주고, 유품도 전하려고
생각을 했다. 나는 휴가를 나가면서 미정씨에게 전화를 하여 원주 어디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고향집이 있는 풍기를 가기 위해서는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데, 원주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잠시 원주에서 내려, 미정씨를
만나 전하여 주고 갈 계획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원주에 내린 나는 약속 장소로 찾아갔다. 굳이 미정씨를 찾지 않아도 한 눈에 나는
그 녀 를 알 아 볼 수 있 었 다 . 하 얀 피 부 에 조 그 맣 고 귀 여 운 아 가 씨 로 상 당 한
미인이었다. 나는 그녀와 마주앉아 우선 물 한 컵을 들이켰다. 그러나 차마 눈까지
마주칠 순 없었다.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한참이나 뜸을 들인 끝에, 나는 결심을
하고 그 동안의 모든 일들을 소상하게 그녀에게 전하여 주었다. 그리고 정성스레
싸온 유품을 그녀에게 전해주었다. 미정씨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울기만 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는 미정씨에게 인사를 하고 그 장소를 나왔다. 그녀는
내가 나가는 것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그저 울고 있기만 했다. 풍기로 가는 열차
속에서 나는 미정씨의 그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워 자꾸만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의 그 아이에게 나의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그 아이를 만나려고
밖으로 나섰다. 막 나서려는데 어머니가 등 뒤에서 던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집 딸, 결혼한단다.” 어머니는 무심코 내게 던진 말씀이었으나, 그 순간 나는
온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꼈다. 내 눈 앞은 갑자기 캄캄해졌다. 어쩔 것인가?
나는 집을 나선 김에 그 아이의 동생 명희를 만났다.
명희의 입을 통하여 어머니의 말씀이 사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주에 살고 있
는 중앙대학교를 나온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아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정처 없이 뚝방 길과 다리 밑,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밤새도록 걷고 또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고, 그저 가슴만 답답할 뿐이었다. 내가 그 숱한 어
려움 가운데 에서도 잘 견디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아이를 사랑한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는데. 나는 결국 그 아이의 집 앞에서 쪼그리고 앉은 채 꼬박 밤을
새고 말았다. 새벽녘에 화장실을 가는 그 아이의 그림자를 숨어 지켜보면서, 가슴이
아파 속으로 울었던 그 날의 그 가슴 아픈 기억이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쓰라린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 날 나는 결국 그 아이를 만날 용기가 나지 않아
부대로 돌아와 버렸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도 너무나 힘들어 하는 내 모습을 보
고, 어떤 동료는 내게 묻기를 “고무신 거꾸로 신었더냐?”라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
나 그의 질문은 나의 경우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사랑을 한다는
말 한마디조차 하지 않았었고, 더군다나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도 아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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